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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네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잡담 2022. 3. 29. 17:39
물리학의 해석 방식으로, 우리가 익숙한 시간의 흐름으로 기술되는 뉴턴역학과, 시작과 끝이 정해져있고 그 사이의 최적화된 경로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기술되는 해석역학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순차적, 인과적 사고에 익숙하여 뉴턴역학에 익숙하며, 해석역학은 시작하는 시점에서 끝을 어떻게 알 수 있겠냐는 직관적인 반발을 일으킨다. 그런데 두 해석 모두 양립 가능하며 그 어느 것도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빛은 최단 경로로 이동한다'는 페르마의 최단시간 원리. 빛이 이동하는 중에 다른 매질을 만났을 때 '굴절률의 차이에 의해 빛이 굴절하게 된다'는 인과적 해석도 가능한 반면, 빛이 시작점과 끝점을 알고 이동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경로로 이동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정해진 미래를 알 수 있으면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면, 자유의지를 통해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으므로 모순이 된다. 하지만 책에서는 미래를 안 사람이 모종의 의무감을 갖게 되어 그대로 행동한다면 이 둘은 양립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 마치 대본을 모두 알고 있는 연극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아니, 정말로 그런 것일까? 미래를 아는 경험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면? 이런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헵타포드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아예 개별 개체의 목적과 역사의 목적을 일치시킨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지와 이를 향한 경로를 정확하게 알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행위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운명에 의한 강제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이 그들이 사는 목적인 거다.
헵타포드들은 자유롭지 않지만 속박당한 것도 아니다. ... 그들의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
언어는 행위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언어행위이론에 의하면 "당신은 체포되었습니다" "약속하겠어" 따위의 서술문들은 모두 수행문이다. 발화자가 이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말을 입 밖에 내서 말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이다. ...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소설에서 나오는 정해진 미래나 운명 같은 건 없다. 굳이 소설의 내용을 우리에게 적용해보자면, 운명처럼 무언가 결과를 바꾸기 힘든 상황에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마음을 거기에 일치시키는 것.
주인공은 남편과의 관계가 진전되기 시작했을 즈음 이미 헵타포드와의 조우를 통해 딸의 탄생, 딸의 인생의 이야기, 딸의 이른 죽음, 자신의 죽음까지 알게 된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동일한 미래를 실현하는 행위를 한다. 책에서는 의무감이라고 표현하지만 별로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운명의 거대한 힘에 의해 강제되는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긍정이나 부정 따위의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그 미래에 스스로 순응하는 듯했다. 딸에게 미래의 이야기를 해주는 어투("네가 ~할 때를 기억해")에서는 슬픔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 슬픔은 내가 읽으면서 주입한 슬픔이고, 말투만을 놓고보면 담담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목적지를 알고 그에 상응하는 경로를 고른 후, 경로 상의 모든 순간들을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기며 나아가는 것 같았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에 새겨두려고 하고 있지." "나는 주의를 기울이고, 그 어떤 세부도 놓치지 않을 작정이야." 와 같은 말들로 이루어져있다. 딸과의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런 말들이 소설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네가 성정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속도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할거야.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움직이는 목표를 조준하는 것 같아.
흥미로운 생각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한 단어 뒤로 다음 단어가 순차적으로 뒤따라야 하는 음성 언어는 병목 현상을 일으킨다. 반면 문자를 쓸 경우에는 한 페이지 위에서 모든 기호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왜 문자를 음성표시라는 구속복으로 속박하고 음성언어와 같은 순차적 구조를 강요한단 말인가? ... 의미표시 문자가 페이지의 2차원성을 활용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형태소를 한 번에 하나씩 늘어놓는 대신, 한 페이지 위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지금까지 사고란 보통 마음속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 ... 사고란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말하는 과정이었다. ... 헵타포드 B를 습득하는 동안 나의 사고가 도형의 형태로 코드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 각 명제들 사이의 관계에 고유한 방향성은 없었고 특정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의 맥락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유에 관여된 모든 요소의 힘을 동등했고, 모두가 동일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과연 순차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이런 총체적인 사고 방식을 갖는 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 싶다. 인간의 뇌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는 연구도 많다. 멀티태스킹처럼 보이는 것들은 실제로 아주 빠른 컨텍스트 스위칭을 통해 마치 동시에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수 있다. 결국 한 시점에 하나의 생각밖에 담지 못하는 이상 여러 명제들을 총체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유연한 사고에 대한 힌트는 얻을 수 있었다. 지나치게 순차적 논리에 집착하다 보면 길을 잃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한 발짝 물러나서 시작점과 도착점, 현재 내 경로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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